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jpg

 

 

절대로 쉽게 읽히지도 한 번에 읽히지도 않았다.

어느정도 읽었다 싶으면 더 읽고 싶은 것이 아니라 쉬고 싶었다.

하지만 재미가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단지 책을 읽는내내 여러 생각을 하게되기 때문에.

 

이 책은 너무나도 현실적이다.

특히 돌아가는 주변상황과 그에 어우러진 인물들의 심리묘사를 보면, 내가 그동안 겪은 혹은 내가 앞으로 겪을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

또한 그 안에 철학적인 요소가 곁들여져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밀란 쿤데라는 '심리를 좀더 강조한 알랭 드 보통' 이다 라는 결론을 내기에 이르렀다.

(밀란 쿤데라보다 알랭 드 보통을 먼저 알게되었기 때문에 이런 비유를 하게 된 것임)

 

때문에 이 책은 한 번 읽고 넘어갈 여타의 소설들과 같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기욤 뮈소와 김진명 씨의 소설이 떠오른다. 이들의 작품은 무지 재밌고 가독성도 뛰어나다. 특히 기욤 뮈소의 책을 읽고 감동을 경험한 적도 있다. 하지만 두 번 읽기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에겐 미안하지만...)

좀더 나이를 먹게되고, 뜨거운 사랑도 경험한 후에는 이 소설은 나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그때는 가벼운 존재, 그리고 무거운 존재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보아야 겠다.

 

 

 

 

 

 

 

p.44 토마스의 우연

7년 전 테레사가 살고 있던 도시의 병원에 <우연히> 치료하기 힘든 편도선 환자가 발생했고, 토마스가 일하던 병원의 과장이 급히 호출되었다. 그런데 <우연히> 과장은 좌골 신경통에 걸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 대신 토마스를 시골 마을에 보냈던 것이다. 그 마을에는 다섯 개의 호텔이 있었는데, 토마스는 <우연히> 테레사가 일하던 호텔에 들렀다. <우연히> 열차가 떠나기 전까지 시간이 남아 그는 술집에 들어가 앉았던 것이다. 테레사가 <우연히> 당번이었고 <우연히> 토마스의 테이블을 담당했다. 따라서 토마스를 테레사에게 데려가기 위해 여섯 개의 우연이 연속적으로 존재해야만 했고, 그것이 없었다면 그는 테레사에게까지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p.59 테레사의 우연

그런데 한 사건이 보다 많은 우연에 의해 좌우될수록 보다 중요하고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나 않을까?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보여졌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집시들이 커피잔 바닥에서 커피 가루가 그린 형상을 통해 의미를 읽듯이, 우리는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쓴다.

그 술집에 토마스가 있었다는 것은 테레사에게 있어서 절대적 우연의 발현이다. 그는 책을 펴놓고 혼자 앉아 있었다. 그는 눈을 들어 테레사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코냑 한 잔!」

그 순간 라디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테레사는 카운터로 코냑을 가지러 가면서 라디오 볼륨을 높였다. 베토벤의 음악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프라하의 한 사중주단이 이 조그만 마을에 순회 공연을 온 뒤부터 그 곡을 알고 있었다. 테레사는 (우리가 알고 있듯 <신분 상승>을 갈구했다) 음악회에 갔었다. 공연장은 텅 비어 있었다. 약사와 그의 부인, 그리고 그녀뿐이었다. 그래서 무대 위엔 사인조의 악단, 객석에는 삼인조의 청중만 있던 셈이었는데, 친절하게도 연주가들은 공연을 취소하지 않고 그들만을 위해 저녁 내내 베토벤의 마지막 사중주 가운데 세 곡을 연주했다.

그 뒤 약사는 음악가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고 낯선 청중도 그 자리에 합석하자고 청했다. 그 후 그녀에게 베토벤은 그녀가 희구하던 세계의 이미지, <저쪽 편> 세계의 이미지가 되었다. 이제 카운터에서 코냑을 들고 토마스에게 다가간 그녀는 이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썼다: 호감이 가는 이 낯선 남자에게 코냑을 가져다주려는 순간 베토벤의 음악이 들리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우연은 필연성과는 달리 이런 주술적 힘을 지닌다. 하나의 사랑이 잊혀지지 않기 위해서는 성 프란체스코의 어깨에 새들이 모여 앉듯 여러 우연이 합해져야만 한다.

우연.

나도 이처럼 우연의 힘을 믿는 사람들 중 하나이다.

언젠가는 나도 토마스와 테레사처럼 '우연의 힘'으로 인연을 만날 수 있길.

그리고 그 때 절대로 그 순간을 놓치지 말길.  

 

p.62

우리의 일상적 삶에는 우연이 빗발치듯 쏟아지는데,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위 우연의 일치라고 불리는, 사람과 사건 간의 우연한 만남들이 그것이다. 예기치 않은 두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거나 조우하는 순간 우연의 일치가 존재한다: 라디오에서 베토벤의 음악이 나오는 순간 토마스가 술집에 등장하는 것 같은.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우연의 일치는 완전히 모르는 채 흘러간다. 토마스 대신에 동네 푸줏간 주인이 테이블에 앉았다면 테레사는 라디오에서 베토벤의 음악이 나오는 것을 주목하지 못했을 것이다. (베토벤과 푸줏간 주인과의 만남 역시도 기묘한 우연의 일치이지만.) 그러나 막 싹이 트는 사랑은 그녀의 미적 감각의 날을 날카롭게 세웠다. 그녀는 이 음악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매번 그 음악을 들을 때마다 그녀는 감격했다. 그 순간 그녀 주변에서 일어날 모든 일은 이 음악의 찬란한 빛에 물들어 아름다울 것이다.

 

p.144

한 인생의 드라마는 항상 무거움의 메타포로 표현될 수 있다. 사람들은 우리의 어깨에 짐이 부과되었다고 말한다. 이 짐을 지고 견디거나, 또는 견디지 못하고 이것과 더불어 싸우다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 그런데 사비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무 일도 없었다. 그녀는 한 남자로부터 떠나고 싶었기 때문에 떠났다. 그후 그 남자가 그녀를 따라왔던가? 그가 복수를 꾀했던가? 아니다. 그녀의 드라마는 무거움의 드라마가 아니라 가벼움의 드라마였다.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헤어진 후에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행동하였던 나에게, 그녀는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으며 그녀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씁쓸한 현실이긴 하지만...

 

p.240

사랑은 메타포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p.254

그는 이 이미지에서 탄생되었다. 이미 말했듯 소설의 인물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처럼 어머니의 육체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의 상황, 문장, 그리고 작가가 생각하기에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거나, 본질적인 것은 언급되지 않았던, 근본적 인간 가능성의 씨앗을 품고 있는 메타포에서 태어난다.

 

p.255

내 소설의 인물들은 실현되지 않은 내 자신의 가능성들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그들 모두를 사랑하며 동시에 그 모두가 한결같이 나를 두렵게 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내가 우회해 갔던 경계선을 뛰어넘었다. 바로 이 경계선(그 너머에서 나의 자아가 끝나는)이 나를 끌어당긴다. 그리고 오로지 경계선 저편에서만 소설이 의문을 제기하는 신비가 시작된다.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함정으로 변한 이 세계 속에서 인간적 삶을 찾아 탐사하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글을 썼기 때문에, 나는 그의 팬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소설의 인물들은 정말로 지극히 현실적이다.

소설 같다는 느낌보다, 마치 내 주위에 있는 사람 혹은 나와 같다는 느낌이다.

그렇기 때문에 좀 더 인물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고  그동안의 내 삶을 반추하게 된다. 

 

p.275

그는 플라톤의 유명한 향연의 신화를 떠올렸다: 옛날에 인간은 양성을 동시에 지녔고, 신은 이를 반쪽으로 분리해서 그때부터 서로 반쪽을 찾으려고 헤맸다는 것이다. 사랑이란, 우리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에 대한 욕망이다.

그렇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들 각자가 과거에는 한몸을 이루었던 반려자를 이 세상 어디엔가 가지고 있다고. 토마스의 다른 반쪽이 그가 꿈에서 보았던 이 젊은 여자이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의 다른 반쪽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대신 테레사 같은 여자를 바구니에 넣어 그에게 흘려보낼 것이다. 그런데 훗날 그에게 숙명적인 여자, 자신의 또 다른 반쪽을 진짜 만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누구에게 호감을 주어야 할 것인가? 바구니 속에서 발견한 여자인가? 아니면 플라톤 신화의 여자인가?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자연스레 떠오르는 것은,

'헤드윅' 이었고 그 중에서도 앵그리 인치가 불렀던 'Origin of love' 가 생각났다. (안 보신 분 있다면 위 동영상 꼭 보시길-)

플라톤의 향연에 따르면, 우리는 남남 or 여여 or 남녀 로 붙어있다가 제우스에 의해 떼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남남 이었을까, 남녀 였을까?

뭐 당연히 남녀였겠지,ㅋㅋㅋ

나는 우연을 믿는 타입이면서도, 운명 또한 믿기 때문에 내 반쪽(?)이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토마스와 같은 상황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 어서 반쪽을 만났으면 좋겠다ㅜ

뭐, 이런 생각을 여전히 하는 것을 보면 난 아직 이상주의적이고 철이 덜 들었다고도 보이겠지만,

나는 뭐 좋은걸- 

 

p.285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란, 똥이 부정되고, 각자가 마치 똥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처신하는 세계를 미학적 이상으로 삼는 것이란 추론이 가능하다. 이러한 미학적 이상이 키치라고 불린다.

이것은 감상적이었던 19세기 중엽에 생겨나 그 이후 다른 모든 언어에 퍼졌던 독일어 단어다. 그러나 그 단어를 자주 사용함에 따라 그것이 지닌 원래의 형이상학적 가치가 지워졌는데, 말하자면 키치란 본질적으로 똥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다: 문자적 의미나 상징적 의미에서 그렇다: 키치는 자신의 시야에서 인간 존재가 지닌 것 중에서 본질적으로 수락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한다.

 

p.307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을 도와주는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어떤 시선을 받으며 살고 싶어하는 지에 따라 네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는 익명의 무수한 시선, 달리 말하자면 대중의 시선을 추구한다. 독일 가수와 미국 여배우가 이런 경우에 속하며 주걱턱의 신문기자 역시 이런 경우에 속한다. 독자들에게 익숙해져서 그의 주간지가 소련인에 의해 정간당하자, 그는 백 배나 산소가 희박해진 공기 속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에게는 누구도 수많은 미지의 시선을 대신할 수 없었다. 그는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가는 곳마다 경찰의 미행을 받고, 전화를 걸 때마다 도청당하고, 심지어는 거리에서 은밀하게 사진까지 찍힌 다는 사실을 알았다. 갑자기 익명의 시선이 도처에서 그를 따라다녔으며, 그러자 그는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는 행복했다! 그는 연극배우 같은 목소리로 벽에 숨겨진 소형 마이크에 대고 소리치곤 했다. 그는 경찰 속에서 잃어버린 관객을 되찾은 것이다.

두번째 범주에는 다수의 친숙한 사람들의 시선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속한다. 이들은 지칠 줄 모르고 칵테일 파티나 만찬의 기회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중을 잃으면 그들 인생의 무대에 불이 꺼졌다고 상상하는 첫번째 범주의 사람들보다는 행복하다. 반면 두번째 범주의 사람들은 언제나 어떤 시선을 획득하는데, 마리클로드와 그녀의 딸이 이에 속한다.

그리고 세번째 범주가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 속에서 사는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이들의 조건은 첫번째 그룹에 속한 사람들의 그것만큼이나 위험천만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이 감기면 무대는 칠흑 속에 빠질 것이다. 테레사와 토마스를 이런 사람들 속에 분류해야만 한다.

끝으로 아주 드문 네번째 범주가 있는데, 부재하는 사람들의 상상적 시선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몽상가이다. 예를 들면 프란츠가 그렇다. 그가 캄보디아 국경까지 간 것은 오로지 사비나 때문이었다. 버스가 태국의 도로에서 덜컹거릴 때, 그녀의 시선이 오랫동안 그에게 고정되었다고 느낀다. 토마스의 아들도 같은 범주에 속한다. 나는 그의 이름을 시몽이라 부르겠다. 그가 희구하는 시선은 토마스의 시선이다. 서명 캠페인에 연루되는 바람에 그는 대학에서 내쫓겼다. 그가 교제하던 젊은 여자는 시골 신부의 조카딸이었다. 그는 그녀와 결혼하여 집단 농장의 트랙터 운전사,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한 가정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는 토마스도 시골에 사는 것을 알자 기뻐했다. 운명이 그들의 삶을 대칭적으로 만들었다고! 그것 때문에 그는 토마스에게 편지를 썼던 것이다. 그는 답장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가 바라는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토마스가 그의 삶에 시선을 보내는 것.

무언가 가장 낭만적으로 보이는 것은 '세번째 범주' 일 것이다.

항상 낭만을 꿈꾸는 나로서도, 내가 세번째 범주 일 것이라곤 아직 생각을 하지 못하겠다. (그런 사랑을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ㅜ)

현재 상황에서 내가 그나마 가까운 쪽은, 음... 네번째 인 것 같다?

 

 p.324

창세기 첫머리에 신은 인간을 창조하여 새와 물고기와 짐승을 다스리게 했다고 씌어 있다. 물론 창세기는 말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신이 정말로 인간이 다른 피조물 위에 군림하길 바랐는지는 결코 확실하지 않다. 인간이 암소와 말로부터 탈취한 권력을 신성화하기 위해 신을 발명했다라는 것이 더 개연성이 있다. 그렇다, 염소를 죽일 권리, 그것은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와중에서도 전 인류가 동지인 양 뜻을 같이 한 유일한 것이다.

이 권리가 당연하게 보이는 것은 우리가 서열의 정점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3자가 이 게임에 끼여들기만 하면 끝장이다. 신이 <너는 다른 모든 별들에 있는 피조물 위에 군림하거라>라고 말한 다른 행성에서 온 방문자가 있다면, 창세기의 자명성은 금세 의문시된다. 화성인에 의해 마차를 끌게 된 인간, 혹은 은하수에 사는 한 주민에 의해 꼬치구이로 구워지는 인간은 그때 가서야 평소 접시에서 잘라 먹었던 소갈비를 회상하며 송아지에게 사죄를 표할 것이다.

여타 SF소설처럼, 인간이 누군가에게 지배를 당한다면?

예를 들면, 개한테 지배를 당하고, 개가 우리를 먹는다면?

오노...

 

p.338

만약 우리가 사랑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무런 요구 없이 타인에게 다가가 단지 그의 존재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는 다른 무엇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밀란 쿤데라는 이 부분에서 '사람과 개' 그리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였다.

보통 '사람과 사람' 이 하는 사랑관계는 이기적이다.

사랑하는 대상이 존재함만으로 만족할 수 없을 뿐더러 우리는 그 대상을 차지하고 옭아맬려고 애를 쓴다.

이런 관계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닌데, 우리 나이 또래의 남자들이 '소녀시대' 에 대한 감정을 떠올려보면 되겠다.

솔직히 그녀들이 우리를 사랑하기를 바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못하고, 그저 계속 이쁘게 커주기만을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지극히 드물뿐이고, 대부분의 사랑은 항상 무언가를 원하고 갈구하는 형태이다.

하지만 '사람과 개'의 상황은 다르다.

외로운 사람에게 개란 존재는, 있기만 해도 사랑스럽다.

개가 뛰어놀고 맛있게 먹고 꼬리를 흔들고만 있어도 사랑의 감정이 샘솟는 것이다.

물론 개가 주인에게 애교를 부리지 않는다면 서운하긴 하겠지만, 증오나 자괴감 질투 이런 감정들은 전혀 생기지 않는다.

그럼 우리들도 우리들만의 관계에서 이런 사랑을 해야 행복하게 될 것인가?

그럴수만 있다면야 사랑이 어렵고 힘들지는 않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올시다.

 

p.340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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