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긋는 남자 - 독서는 나의 힘
단순한 연애소설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고찰을 하게 만들어주는,
마치 알랭드보통의 책과 같은 느낌을 주는 책.
이래서 김연수가 좋은 것이다.
p.55
왜 우리는 사랑을 '맺거나' 사랑을 '이루지' 않고 사랑에 '빠지는' 것일까?
그건 사랑이란 두 사람이 채워 넣을 수 있는 가장 깊은 관계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집어넣어도 그 관계는 채워지지 않는다.
정열, 갈망, 초조, 망설임, 투정, 침착, 냉정, 이기심, 헌신, 질투, 광기, 웃음, 상실, 환희, 눈물, 어둠, 빛, 몸,마음, 영혼 등
그 어떤 것이든 이 깊은 관계는 삼켜버린다.
모든 게 비워지고 두 사람에게 방향과 세기만 존재하는 힘,
그러니까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원초적인 감정의 움직임만 남을 때까지
그 관계 속으로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밀어넣는 일은 계속된다.
그런 과정을 되풀이하다가 마침내 마음의 숲 속 빈터가 열리게 되면
뜨거운 육체의 아름답고 털 없는 동물들이 뛰놀게 된다고 서양의 어느 시인은 노래했다.
p.57
처음에는 두 사람이 함께 빠져들었지만, 모든게 끝나고 나면 각자 혼자 힘으로 빠져나와야 하는 것.
그 구지레한 과정을 통해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뼛속 깊이 알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다.
p.105
당연히 사랑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상대방을 알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쓴다.
부모님은 자상한 분인지 고지식한 분인지, 형제끼리는 서로 마음이 잘 통하는지 아닌지,
지금 사는 집은 어디인지 거기서 태어났는지 아니면 고향은 어디 다른 곳인지 끊임없이 물어본다.
질문과 대답이 되풀이되면서 사랑은 점점 더 깊어진다.
면접시간에 옆에 앉은 사람보다 더 많은 대답을 할 수 있다면 최소한 경쟁자 한 명을 제친 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다.
상대방에 대한 구체적 호기심이 모두 충족되고 나면 추상적 호기심이 시작된다.
슬플 때는 곧장 눈물을 흘리는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범하게 구는지,
태어나서 제일 기뻤던 순간은 언제이며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절은 또 언제인지,
삶을 자신의 눈으로만 바라보는지 다른 사람의 눈까지 생각해서 바라보는지 등이 두번째 굽이에서 알아내야만 하는 것들이다.
우리가 정상적인 사랑의 단계를 밟아나간다면 필경 이 다음에 생기는 호기심은 육체적인 것이리라.
손의 따뜻함, 입술의 부드러움, 가슴의 포근함, 그리고 마침내 말로 표현하기 힘든 성기의 아찔함까지 알게되면
상대방에 대한 모든 것을 알게 됐다는 느낌이 든다.
그 순간, 두 연인은 서로를 향해 자신의 존재를 활짝 열어젖혔다고 생각한다.
그 즈음에 이르면 두 사람은 이제 서로에게 더 이상 질문을 던지지 않게 된다.
비밀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서로의 존재는 백열등처럼 환하게 드러나게 됐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 상태는 깊은 사랑이 아니라 깊은 착각에 가깝다.
우리는 서로에게 영원한 타인이다. 우리는 자신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완전히 알 수는 없다.
혼신의 힘을 바쳐 사랑한다고 해도 우리가 모르는 부분은 영영 남게 된다.

